00:00
00:00

 

이와 전후하여 임시정부 공금 횡령법 김립은 오면직, 노종균 두 청년에게 총살을 당하니 인심이 쾌하다 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한형권의 러시아에 대한 대표권을 파면하고 안공근을 대신 보내었으나 별효과가 없어서 임시정부와 러시아와의 외교관계는 이내 끊어지고 말았다.
 상해에 남아 있는 공산당원들은 국민대표회가 실패한 뒤에도 좌우 통일이라는 미명으로 민족 운동자들을 달래어 지금까지 하여 오던 민족적 독립운동을 공산주의 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자고 떠들었다. 재중국 청년동맹, 주중국 청년동맹이라는 두 파 공산당의 별동대로 상해에 있는 우리 청년들은 앞다투어 같은 소리를 하였다.  민족주의자가 통일하여서 공산혁명운동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또 한 희극이 생겼다. '식민지에서는 사회운동보다 민족독립운동을 먼저 하여라.'하는 레닌의 새로운 지령이었다. 이에 어제까지 민족독립 운동을 비난하고 조소하던 공산당원들은 순식간에 민족독립운동자로 졸변하여 민족독립이 공산당의 방침이라고 부르짖었다.  공산당이 이렇게 되면 민족주의자도 그들을 배척할 이유가 없어졌으므로 유일 독립당 촉성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입으로 하는 말만 고쳤을 뿐이요, 속은 그대로 있어서 민족운동이란 미명하에 민족주의자들을 끌어 넣고는 그들의 헤게모니, 소위 주도권으로 옭아 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민족주의자들도 그들의 모략이나 전술을 다 알아서 그들의 손에 쥐어지지 아니하므로 자기네가 설도 하여 만들어 놓은 유일독립 촉성회를 자기네 음모로 깨뜨려 버리고 말았다.
 그러고 생긴 것이 한국독립당이니 이것은 순전한 민족주의자의 단체여서 이동녕. 안창호, 조완구, 이유필, 차이석, 김붕준, 송병조 및 내가 수뇌가 되어 조직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민족운동자와 공산주의자가 다른 조직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민족주의자가 단결하게 되니, 공산주의자들은 상해에서 할 일을 잃고 남북 만주로 달아났다. 거기는 아직 동포들의 민족주의적 단결이 분산되어 박약하고 또 공산주의의 정체에 대한 인식이 없었으므로, 그들은 상해에서보다 더 맹렬하게 날뛸 수가 있었다.
 예를 들면 이상룡의 자손은 공산주의에 충실한 나머지 아비를 죽인다는 살부회까지 조직하였다. 그러나 제 아비를 제 손으로 죽이지 않고 회원끼리 서로 아비를 바꾸어 죽이는 것이라 하니 아직도 사람의 마음이 조금은 남은 것이었다. 이 붉은 무리는 만주의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 남군정서, 북군정서 등에 스며들어가 능란한 모략으로 내부로부터 분해시키고 상극을 시켜 이 모든 기관을 혹은 붕괴하게 하고 혹은 서로 싸워서 여지없이 파괴하여 버리고 동포끼리 많은 피를 흘리게 하니, 백광운, 김좌진, 김규식(나중에 박사라고 된 김규식은 아니다) 등 우리 운동에 없지 못할 큰 일꾼들이 이 난리통에 아까운 희생이 되고 말았다.
 
 국제 정세에서 우리에 대한 냉담, 일본의 압박 등으로 민족의 독립 사상이 나날이 감쇄하던 중에 공산주의자의 교란으로 민족전선은 분열에서 혼란으로, 혼란에서 궤멸로 굴러떨어져 갈 뿐이었다. 그런데, 엎친데 덮치기로 만주의 주인이라 할 장작림이 일본의 꾀에 넘어가서 그의 치하에 있는 독립운동자를 닥치는 대로 잡아 일본에 넘기고, 심지어는 중국 백성들이 한인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가서 왜 영사관에서 한 개에 많으면 10원, 적으면 3,4원의 상금을 받게 되고, 나중에는 우리 동포 중에도 독립군의 소재를 밀고하는 일까지 생겼다. 여기에는 독립운동자들이 통일됨이 없이 셋, 다섯으로 갈라져서 재물이나 기타 이유로 동포에게 귀찮음을 준 책임도 없지 아니하다.
 이러하던 끝에 왜가 만주를 점령하여, 소위 만주국이란 것을 만드니 우리 운동의 최대 근거지라 할 만주에 있어서의 우리 운동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다.  애초에 만주에 있던 독립운동 단체는 모두 임시정부를 추대하였으나 차차로 군웅할거의 나쁜 바람이 불어, 정의부와 신민부가 우선 임시정부의 절제를 안 받게 되었다.
 그러나 참의부만은 끝까지 임시정부에 대한 의리를 지키더니, 이 셋이 합하여 새로 정의부가 된 뒤에는 임시정부와는 관계를 아주 끊고 자기들끼리도 사분오열하여 서로 제 살을 깎고 있다가 마침내 공산당으로 인해 서로 제 목숨을 끊는 비극을 연출하고 막을 내리고 말았으니 진실로 슬픈 일이다.
 상해의 정세도 소위 양패구상으로 둘이 싸워 둘이 다 망한 셈이 되었고, 한국독립당 하나로 겨우 민족진영의 껍데기를 유지할 뿐이었다.
 임시정부에는 사람도 돈도 들어오지 아니하여 대통령 이승만이 물러나고 박은식이 대신 대통령이 되었으나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고쳐 놓고 나간 후, 제 1세 국무령으로 뽑힌 이상룡은 서간도에서부터 상해로 취임하러 왔으나 각원을 고르다가 지원자가 없어 도로 서간도로 물러갔다. 다음에 홍면희가 당선이 되어 진강에서 상해로 와서 취임하였으나 역시 내각조직에 실패하였다. 이리하여 임시정부는 한참 동안 무정부 상태에 빠져서 의정원에서 큰 문제가 되었다.
 하루는 의정원 의장 이동녕 선생이 나를 찾아와서 내가 국무령이 되기를 권하였으나 나는 두 가지 이유로 사양하였다. 첫째 이유는 나는 해주 서촌의 일개 김씨를 대표하는 우두머리의 아들일분이니 우리 정부가 아무리 아직 초창 시대의 원형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나같이 미천한 사람이 일국의 원수가 된다는 것은 국가와 민족의 위신에 큰 관계가 있다는 것이요, 둘째로 말하면 이상룡, 홍면희 두 사람도 사람을 못 얻어서 내각조직에 실패하였거늘 나 같은 자에게 더욱 응할 인물이 없을 것이란 것이었다. 그런즉 이씨 말이 첫째는 이유가 안 되는 것이니 말할 것도 없고 둘째로 말하면 나만 나서면 따라 나설 사람이 있다고 강권하므로 나는 승낙하였다. 이에 의정원의 정식 절차를 밟아서 내가 국무령으로 취임하였다.
 나는 윤기섭, 오영선, 김갑, 김철, 이규홍 등으로 내각을 조직하고 현재의 제도로는 내각을 조직하기가 번번이 곤란할 것을 통절히 깨달았으므로 한 사람에게 책임을 지우는 국무령제를 폐지하고 국무위원제로 개정하여 의정원의 동의를 얻었다. 그래서 나는 국무위원의 주석이 되었으나 제도로 말하면 주석은 다만 회의의 주석이 될 뿐이요, 모든 국무위원은 권리에나 책임에나 평등이었다. 그리고 주석은 위원들이 차례대로 할 수 있는 것이므로 매우 편리하여 지금까지의 가라앉지 않은 문제들을 한번데 없앨 수가 있었다.
 이렇게 하여 정부는 자리가 잡혔으나 경제 곤란으로 정부의 이름을 유지할 길이 망연하였다. 정부의 집세가 30원, 심부름꾼 월급이 20원 미만이었으나, 이것도 낼 힘이 없어서 집주인에게 여러 번 송사를 겪었다.
 다른 위원들은 거의 다 식구들이 있었으나 나는 아이들 둘도 다 본국 어머니께로 돌려보낸 뒤라 홀몸이었다. 그래서 나는 임시정부 정청에서 자고 밥은 돈벌이 직업을 가진 동포의 집으로 이집 저집 돌아다니면서 얻어 먹었다. 동포의 직업이라 하여 전차 회사의 차표 검사원인 인스펙터가 제일 많은 직업이어서 70명 가량 되었다. 나는 이들의 집으로 다니며 아침 저녁을 빌어먹는 것이니, 거지 중에는 상거지였다. 다들 내 처지를 잘 알므로 누구나 내게 미운밥은 아니 주었다고 믿는다. 특히 조봉길, 이춘태, 나우, 진희창, 김의한 같은 이들은 절친한 동지들이니 더 말할 것 없고 다른 동포들도 내게 진정으로 동정하였다.
 엄항섭 군은 프랑스 공무국에서 받은 월급으로 이동녕이나 나 같은 궁한 운동자를 먹여 살렸다. 그의 전처 임씨는 내가 그 집에 갔다가 나올 때면 대문 밖에 따라나와서 은전 한두 푼을 내 손에 쥐어 주며, "애기 사탕이나 사주셔요." 하였다. 아기라 함은 내 둘째 아들 신을 가리킨 것이었다. 그는 초산에 딸 하나를 낳고 가엾이 세상을 떠나서 노가만에 있는 공동묘지에 묻혔다. 나는 그 무덤을 볼 때마다 만일 엄군에게 그러할 힘이 아니 생기면 나라도 묘비 하나는 해 세우리라 하였으나 숨어서 상해를 떠나는 몸이라, 그것을 못한 것이 유감이다. 오늘날도 노가만 공동묘지 임씨의 무덤이 눈에 아른거린다. 그는 그의 남편이 존경하는 늙은이라며 내게 그렇게 끔찍하게 해주었다.
 나는 애초에 임시정부의 문 파수를 지원하였던 것이 경무국장으로, 노동국총판으로, 내무총장으로, 국무령으로 오를 대로 다 올라서 다시 국무위원이 되고 주석이 되었다.  이것은 문 파수의 자격이던 내가 진보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비교해보면 이름났던 대가가 몰락하여 거지의 소굴이 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일찍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시무할 때에는 중국인은 물론이요, 눈 푸르고 코 높은 영국, 미국, 프랑스 등의 외국인도 정청에 찾아오는 일이 있었으나 지금은 서양 사람이라고는 프랑스 순포가 왜 경관을 대동하고 사람을 잡으러 오거나 밀린 집세 채근을 받으러 오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한창 적에는 천여 명이나 되던 독립운동자가 이제는 수십 명도 못 되는 형편이었다.
 왜 이렇게 독립운동자가 줄었는가. 첫째로는 임시정부의 군무차장 김희선, 독립신문사장 이광수, 의정원 부의장 정인과 같은 무리는 왜에게 항복하여 본국으로 들어가고, 둘째로는 국내 각 도, 군, 면에 조직하였던 연통제가 발각되어 많은 동지가 왜에게 잡혔고, 셋째로는 생활난으로 하여 각각 흩어져 밥벌이를 하게 된 까닭이었다.
 이러한 상태에 있어서 임시정부의 할 일이 무엇인가.  첫째로 돈이 있어야 할 터인데 돈이 어디서 나오나? 본국과 만주와는 이미 연락이 끊겼으니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에게 임시정부의 곤란한 사정을 말하여 그 지지를 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내 편지 정책이었다. 나는 미주와 하와이 재류 동포의 열렬한 애국심을 믿었다. 그것은 서재필, 이승만, 안창호, 박용만 등의 훈도를 받은 까닭이었다.
 나는 영어에는 문맹이므로 편지 겉봉도 쓸 줄 몰랐으므로, 엄항섭, 안공근 등에게 의뢰하여서 쓰게 하였다. 그러나 이 편지 정책의 효과를 기다리기는 벅찼다. 그때에는 아직 항공 우편이 없었으므로 상해와 미국간에 한 번 편지를 부치고 답장을 받으려면 두 달이나 걸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다린 보람은 있어서 차차 동정하는 회답이 왔고, 시카고에 있는 김경은 그곳 공동회에서 모은 것이라 하여 집세나 하라고 미화 2백 불을 보내 왔다. 당시 임시정부의 형편으로는 이것이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돈도 돈이려니와 동포들의 정성이 고마왔다. 김경은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었다.
 하와이에서도 안창호, 가와이, 현순, 김상호, 이홍기, 임성우, 박종수, 문인화, 조병요, 김현구, 황인환, 김윤배, 박신애, 심영신 등 제씨가 임시 정부를 위하여 정성을 쓰기 시작하고 미주에서는 국민회에서 점차로 정부에 대한 향심이 생겨서 김호, 이종소, 홍언, 한시대, 송종익, 최진하, 송헌주, 백일규 등 제씨가 일어나 정부를 지지하고 멕시코에서는 김기창, 이종오 쿠바에서는 임천택, 박창운 등 제씨가 임시정부를 후원하고 동지회 방면에서는 이승만 박사를 위시하여 이원순, 손덕인, 안현경 제씨가 임시정부를 유지하는 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하와이에 있는 안창호(도산 안창호가 아님), 임성우 양씨는 내가 민족에 써야할 일을 한다면 돈을 주선하마 하였다.
 하루는 어떤 청년 동지 한 사람이 거류민단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는 이봉창이라 하였다. 나는 그때에 상해 거류민단장도 겸임하고 있었다.  그는 말하기를 자기는 일본서 노동을 하고 있었는데 독립운동에 참예하고 싶어서 왔으니 자기와 같은 노동자도 노동을 하면서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가 하였다. 그는 우리말과 일본말을 섞어 쓰고 임시정부를 가정부라고 왜식으로 부르므로 나는 특별히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민단 사무원을 시켜 여관을 잡아주라 하고 그 청년더러는 이미 날이 저물었으니 내일 또 만나자 하였다.
 며칠 후였다. 하루는 내가 민단 사무실에 있노라니 부엌에서 술 먹고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 청년이 이런 소리를 하였다.  "당신네들은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왜 일본 천황을 안 죽이오?" 
 이 말에 어떤 민단 사무원이, "일개 문관이나 무관 하나도 죽이기가 어려운데 천황을 어떻게 죽이오?" 한즉, 그 청년은, "내가 작년에 천황이 능행을 하는 것을 길가에 엎드려서 보았는데, 그때에 나는 지금 내 손에 폭발탄 한 개만 있었으면 천황을 죽이겠다고 생각하였소." 하였다.
 나는 그날 밤에 이봉창을 그 여관으로 찾았다. 그는 상해에 온 뜻을 이렇게 말하였다.
 "제 나이가 이제 서른 한 살입니다. 앞으로 서른 한 해를 더 산다하여도 지금까지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 늙겠으니까요.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이란 것은 대강 맛을 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 사업에 몸을 바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
 이씨의 이 말에 내 눈에는 눈물이 찼다.  이봉창 선생은 공경하는 태도로 내게 국사에 헌신할 길을 지도하기를 청하였다.  나는 그러마 하고 쾌락하고 1년 이내에는 그가 할 일을 준비할 터이나 시방 임시정부의 사정으로는 그의 생활비를 댈 길이 없으니 그동안 어떻게 하려는가고 물었더니, 그는 자기는 철공에 배운 재주가 있고 또 일어를 잘하여 일본서도 일본 사람으로 행세하였고, 또 일본 사람의 양자로 들어가 성명도 ‘기노시타 쇼조’ 라 하여 상해에 오는 배에서도 그 이름을 썼으니, 자기는 공장에서 생활비를 벌면서 일본 사람 행세를 하며 언제까지나 나의 지도가 있기를 기다리노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나는 그에게, 나하고는 빈번한 교제를 말고 한 달에 한 번씩 밤에 나를 찾아와 만나자고 주의시킨 후에 일본인이 많이 사는 홍구로 떠나보냈다.  수일 후에 그가 내게 와서 월급 80원에 일본인의 공장에 취직하였노라 하였다.  그 후부터 그는 종종 술과 고기와 국수를 사 가지고 민단 사무소에 와서 민단 직원들과 놀고 술이 취하면 일본 소리를 잘하므로 '일본경감'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어느 날은 하오리에 일본 나막신을 신고 정부 문을 들어서다가 중국인 하인에게 쫓겨난 일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동녕 선생과 기타 국무원들에게 한인인지 일인인지 판단키 어려운 인물을 정부 문 내에 출입시킨다는 책망을 받았고, 그때마다 조사하는 일이 있어서 그런다고 변명하였으나 동지들은 매우 불쾌하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이럭저럭 이씨와 폭탄도 돈도 다 준비가 되었다. 폭탄 한 개는 왕웅을 시켜 상해 병공창에서, 한 개는 김현을 하남성 유치한테 보내어 얻어온 것이니 모두 수류탄이었다. 이 중에 한 개는 일본 천황에게 쓸 것이요, 한 개는 이씨 자살용이었다.  나는 거지 복색을 입고 돈을 몸에 지니고 거지 생활을 계속하니 아무도 내 품값으로 천여 원의 큰 돈이 들어간 줄을 아는 이가 없었다.
 12월 중순 어느 날, 나는 이봉창 선생을 비밀리 상해 법조계의 중흥여사라는 곳으로 불러서 하룻밤을 같이 자며 이 선생이 일본에 갈 일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논을 하였다. 만일 자살이 실패되어 왜 관헌에게 심문을 받게 되거든 이 선생이 대답할 문구까지 일러주었다. 그 밤을 같이 자고 이튿날 아침에 나는 내 헌옷 주머니 속에 돈뭉치를 내어 이봉창 선생에게 주며 일본 갈 준비를 다하여 놓고 다시 오라 하고 서로 작별하였다.
 이틀 후에 그가 찾아왔기로 중흥여사에서 마지막 한 밤을 둘이 함께 잤다. 그때에 이씨는 이런 말을 하였다.
 "일전에 선생님이 내게 돈뭉치를 주실 때에 나는 눈물이 났습니다. 나를 어떤 놈으로 믿으시고 이렇게 큰 돈을 내게 주시나 하고, 내가 이 돈을 떼어 먹기로, 법조계 밖에는 한 걸음도 못 나오시는 선생님이 나를 어찌할 수 있습니까. 나는 평생에 이처럼 신임을 받아 본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처음이요, 또 마지막입니다. 참으로 선생님이 하시는 일은 영웅의 도량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길로 나는 그를 안공근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선서식을 행하고 폭탄 두 개를 주고 다시 그에게 돈 3백원을 주며 이 돈은 모두 동경까지 가기에 다 쓰고 동경 가서 전보만 하면 곧 돈을 더 보내마고 말하였다. 그리고 기념 사진을 찍을 때에 내 낯에는 처연한 빛이 있던 모양이어서 이씨가 나를 돌아보고, "제가 영원한 쾌락을 얻으러 가는 길이니 우리 기쁜 낯으로 사진을 찍읍시다." 하고 얼굴에 빙그레 웃음을 띄운다. 나도 그를 따라 웃으면서 사진을 찍었다.
 자동차에 올라 앉은 그는 나를 향하여 깊이 허리를 굽히고 홍구를 향하여 가 버렸다.  10여 일 후에 그는 동경에서 전보를 보내었는데 물품은 1월 8일에 방매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곧 2백원을 전보환으로 부쳤더니, 편지로 미친놈처럼 돈을 다 쓰고 여관비 밥값이 밀렸던 차에 2백원 돈을 받아 주인의 빚을 청산하고도 돈이 남았다고 하였다.
 당시 정세로 말하면 우리 민족의 독립사상을 떨치기로 보거나 또 만보산 사건, 만주사변 같은 것으로 우리 한인에 대하여 심히 악화된 중국인의 악감을 풀기로 보거나 무슨 새로운 국면을 타개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 임시정부에서 회의한 결과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암살과 파괴공작을 하되, 돈이나 사람이나 내가 전담하여 하고 다만 그 결과를 정부에 보고하라는 전권을 위임받았었다. 1월 8일이 임박하므로 나는 국무위원에 한하여 그동안 경과를 보고하여 두었었다.
 기다리던 1월 8일 중국 신문에  '한국인 이봉창이 일본 천황을 저격하였으나 명중하지 못했다.'이라고 하는 동경 전보가 게재되었다. 이봉창이 일황을 저격하였다는 것은 좋으나 맞지 아니하였다는 것이 극히 불쾌하였다. 그러나 여러 동지들은 나를 위로하였다.
 일본 천황이 그 자리에서 죽은 것만은 못하나 우리 한인이 정신상으로는 그를 죽인 것이요, 또 세계 만방에 우리 민족이 일본에 동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웅변으로 증명하는 것이니 이번 일은 성공으로 볼 것이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지들은 내 신변을 주의할 것을 부탁하였다.
 아니나다를까, 이튿날 아침일찍 프랑스 공무국으로부터 비밀리 통지가 왔다. 과거 10년간 프랑스 관헌이 김구를 보호하였으나, 이번 김구의 부하가 일황에게 폭탄을 던진 데 대하여서는 일본의 김구 체포 인도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중국 국민당 기관지 청도의 '국민일보'는 특호 활자로, '한국인 이봉창이 일본 천황을 저격하였으나 불행히 맞지 않음' 이라고 썼다 하여 당지 주둔 일본 군대와 경찰이 그 신문사를 습격하여 파괴하였고, 그 밖에 장사 등 여러 신문에서도 '불행히도 적중하지 못했다'라고 문구를 썼다 하여 일본이 중국 정부에 엄중한 항의를 한 결과로 '불행'자를 쓴 신문사는 모두 폐쇄를 당하고 말았다.
 그러자 상해에서 일본의 승려 하나가 중국인에게 맞아 죽었다는 것을 비밀로 하여 일본은 1·28 상해사변을 일으켰으니, 기실은 이봉창 의사의 일황 저격과 이에 대한 중국인의 '불행히도'라고 말한 감정이 전쟁의 주요 원인이었다.
 나는 동지들의 권유에 의하여 낮에는 일체 활동을 쉬고, 밤에는 동지의 집이나 창기의 집에서 자고, 밥은 동포의 집으로 돌아 다니면서 얻어 먹었다. 동포들은 정성껏 나를 대접하였다.
 19로군의 채정해와 중앙군 제 5군장 장치중의 참전으로 일본군에 대한 상해 싸움은 가장 격렬하게 되어서 상해 법조계 안에도 후방 병원이 설치되어 중국 측 전사병의 시체와 부상병을 가뜩가뜩 실은 트럭이 피를 흘리고 왕래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언제 우리도 왜와 싸워 본국 강산을 피로 물들일 날이 올까생각하니 자꾸 눈물이 흘러 통행인들이 수상히 볼까 고개를 숙이고 피해 버렸다.

다른 화

목록보기